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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사 1권 자료 정리 [30년 전 자료 정리] 1988년 학부 때 이런 훈련을 하면서 책 1권 원고를 쓰고, 이어서 신학교 5년 동안 책 두 권을 쓴 후, 유학을 갔기에 그나마 자료를 보고 나중에 책을 쓸 수 있었다. 이 자료는 복사본인데 원본은 다른 데 있는 듯. 몇 가지 색깔로 쓴 원본이 중요해서 따로 보관하고, 복사본에 필요한 메모를 추가해 나갔다.
1985 김영재 교수의 한국기독교사 강의 첫 시간 노트 [그 때 그 시절] 1985 김영재 교수의 한국기독교사 강의 첫 시간 노트. 수업 시간에 그대로 받아 쓴 것. 나름 정리하며 노트했다^^ 나는 학부를 오래 다닌 결과 서울대 종교학과에 개설된 한국기독교사 강의를 세 번 들었다. 1985년에 총신대 김영재 교수님, 1986년에 고려대 조광 교수님, 1987년에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님의 강의를 직접 들었다. 가히 전설적인 이야기^^ 사진은 김영재 교수님 강의 노트 2페이지. 아래 부분에 왜 한국에서 교회사가 발전하지 않나? (1) 역사가 짧아서 (2) 교회사를 우습게 보기 때문에, (3) 공부하기가 어려워서. 세번째 이유는 역사, 종교사 등 문화사를 공부하고 역사신학도 해야 되기 때문이라는 말. 유학할 경우 신약이나 구약은 외국인과 경쟁 가능하나 미국교회사나..
문익환 목사: 공동번역과 통일의 꿈 북간도 출신 문익환(文益煥)은 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성서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으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로 성서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을 갔다. 그런데 이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거제도에 있던 아내와 가족의 생사를 걱정하며 한국에 오고자 했으나 올 길이 막혀있었다. 일본 맥아더사령부에 통역병으로 지원해서 도쿄에 거주하면서 아내를 부를 수 있었다. 문익환과 휴전회담, 1951-53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문익환이 회담에 투입된 시점은 1951년 늦가을이었다. "도쿄에서 헬기를 타고 판문점에 이르면, 휴전회담은 언제나 3자 회담으로 진행되었다. ..
조용기 목사와 불교와 도올 김용옥 박사 1. 조용기 목사 200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특강 http://kr.blog.yahoo.com/woo1954/364285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다(조용기 목사 강의내용)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특강…다원주의적 종교관 논란 예상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5월 12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자신의 종교관을 밝혔다. 그 동안 보수적으로 알려진 조용기 목사가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피력함에 따라 상당한 논란이 일 것으로..
missional life What is mission? 선교적 삶이란, 선교적 교회란? 나의 미션은 무엇인가? What is my mission? 복음(天), 상황(地), 미션(人) 복음 없이도 미션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과 상황이 만나는 자리에서 나의 나 됨, 내가 할 일이 미션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미션이다. 복음과 상황, 이 둘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내 미션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상황도 변하고 나의 복음 이해도 변하니, 내 미션도 변한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내 미션을 분명히 하고 그 미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선교적 삶이다. 내 미션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고 성취하도록 하는 동시에, 남의 미션도 중히 여기고, 동역자도 만나자.
1959 통합 합동 분열 1 올해 2019년은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 문제를 대충 거론해 보려고 한다. 갈라진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향후 연합도 생산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60년 환갑이 지났으니 다시 논의하면서 연합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 가장 문제가 되는 두 가지로 거론된 것이 1)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로비 사건과 2) WCC 파와 NAE 파의 신학적 대결이었다. 전자가 분열의 실제적인 이유였다면, 후자는 신학적 명분적 이유였다. 일단 3,000만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0 모든 글에는 3,000만환을 거론한다. ..
1975 박형규 목사 1938-45년 북한에서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1960년대에 교회는 죽었을 것이다. 1972-79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80년대에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0-87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90년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교회가 교회 내부의 부패와 불법에 대해서마저 침묵한다면 2020년대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 교회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여기 박형규 목사의 대담 기사가 있다.
Missional Church: 가나안 성도가 주는 의미 1970년대 유신 독재로 민주주의가 압살되고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8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대법원 판결 후 즉시 사형에 처하자,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공산 정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산주의가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980년 5월 광주 사태로 독재의 광기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자 공산주의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렸다. 1984년 대학가 민족해방 노선파는 주체 사상으로 무장하고 운동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건국 세대, 산업화 세대에 이어 386세대가 생성되었다. 1987-2007년 20년 간 대형교회가 성장하고 당회자 권력 집중과 독재에 의한 부패가 심해지자 반개독교 운동이 일어났다. 지난 10년 간 세습과 표절이 성행하면서 교회를 떠난 교인들이 가나안 성도가 되..